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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누가복음 2장 11절).
 
 
사랑의 종교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 요한은 말하기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장 8절)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다 연구한다면 그 내용을 한마디로 줄여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아닌 일반 종교 특히 우상을 섬기는 자연 종교는 신(神)을 몹시 두렵고 엄한 존재로 인정합니다. 신을 소홀히 하거나 그 행위에 잘못이 있는 사람은 곧 엄한 저주를 받고 벌을 받게 된다고 믿습니다. 즉 우상 숭배자들 사이에는 복을 받기 위하여 신을 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그 신자들은 대개 이러한 경향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가르치고 우주의 지배 원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가장 밀접한 관계로써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하늘과 땅처럼 먼 거리에 있는 것으로 표현하지 않고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나타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게 되었으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하나님과 결합시키고 아버지와 아들과의 밀접한 관계로 회복시켜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요한은 이 고상하고 오묘한 뜻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였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한일서 3장 1, 2절).  
  이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감격과, 세상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해하지 못함에 대한 애석함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시고 그에게 참된 행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 앞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세상이 아무리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믿지 않을지라도 저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큰 특권으로 알고 스스로 만족함과 기쁨을 느낍니다.  
 

지극한 사랑 
  하나님께서 잃어버렸던 우리, 죽고 멸하여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영원 전부터 같이 계셨던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사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게 한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큰 희생과 지극한 사랑에 대하여 무한한 감격을 느끼게 됩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기록하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불순종함으로 멸망할 자를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신 그 놀라운 사랑, 그것은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실제로 성취하신 이가 바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를 위한 사랑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요? 대저 공의는 사사로운 정에 매이지 아니하고 원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한번 맺은 언약, 한번 세운 법은 다시 고치지 않는 것이 공의입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장 17절)고 한 원칙을 어겼으니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불순종의 씨를 가지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불행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죄의 근성은 그 후손들에게도 유전되어 그들도 역시 죄를 범하고, 죄인 아닌 자는 한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은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이 죄악으로 가득 차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온 인류는 멸망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인류, 영원히 행복을 누리며 사랑의 대상자가 되어 주기를 기대했던 그 인류가 멸망하는 것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값을 대신 갚고 인류의 죄의 근성을 근본적으로 고쳐주셔서 인류로 하여금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우리 인류의 심령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공의를 살리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신 오묘한 진리입니다.
 

유일한 방법
  인류를 구원하는 데는 오직 이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쓰라린 경험을 맛보신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 길밖에 없었을까요? 사람으로서는 사람의 죄를 대신 질자가 없습니다. 이는 죄인 아닌 자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한 사람으로서 전 인류의 죄를 담당할 자도 없습니다. 이는 전 인류의 가치와 대등한 가치를 지닌 자가 인류 중에는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공자나 석가모니나 모하메드나 소크라테스와 같이 위대한 성인일지라도, 그들 역시 인류의 조상 아담의 후예로서, 모태로부터 죄의 유전과 품성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선(善)을 행하였다 할지라도 그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죄의 운명을 면치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보통 인간과 다르십니다. 그분은 신성(神性)으로서 인성(人性)을 쓰신 것입니다. 곧 그는 하나님의 성자(聖者)로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는 곧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손으로 우리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 밖에는 우리 인간의 잘못된 심성을 바로잡아 줄 이가 없으며, 그분 이외에는 우리 죄를 대속해 줄 이가 없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장 6~8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로마서 1장 15~17절). 
  그런 까닭에,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수천 명의 대중 앞에서 큰소리로 담대히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장 12절).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우리를 죄와 죄의 결과에서 건져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바 된 인류를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인성을 쓰고 세상에 오시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공부해 봅시다.  
 

처녀 마리아의 잉태
  아시아의 맨 서쪽 지중해 연안에 팔레스틴이란 지방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에 이 지방에 유대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의 북쪽 갈릴리 지방에 나사렛이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요셉’이라는 목수가 살았는데, 그는 같은 마을에 사는 ‘마리아’라는 처녀와 약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요셉에게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이 사연이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청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태복음 1장 18~20절).
  여기에 자세한 말이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천사는 몰론 요셉이 이해할 만큼 마리아의 잉태한 바는 하나님이 일찍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곧 이스라엘 민족이 오랫동안 바라던 메시야임을 분명히 인식시켰을 것이요, 또는 이사야가 이미 7백 년 전에 예언한 바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장 14절)는 말씀을 상기시켜 그로 의심을 버리게 하고 메시야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했을 것입니다(‘메시야’는 히브리어로, 헬라어의 ‘그리스도’와 같은 말입니다.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란 뜻이며, 유대인들이 흔히 구주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천사가 계속하여 요셉에게 이르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장 21절)고 하였습니다(예수라는 말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에 요셉은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마리아 데려오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처녀 마리아에게는 천사가 나타나 이러한 기별을 전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누가복음 1장 28, 31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누가복음 1장 34, 35절).  
  마리아도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두려워했으나 천사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이스라엘 온 민족이 바라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자기 몸에서 나시겠다는 귀한 허락을 믿게 되어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누가복음 1장 38절) 하고 공손히 그 신앙을 표명하였습니다. 현대의 과학으로는,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이해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 가운데는 이러한 초과학적 기적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 있어서도 해명할 수 없는 기괴한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명할 수 없는 일은 모두 부인해야만 할까요? 부인한다고 그것이 사실을 바로 판단하는 것이 될까요?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무엇이나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다”. (누가복음 1장 37절). 우리는 차라리 다윗과 같이 “이 지식이 네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편 139편 6절)라고 겸손히 고백함이 현명한 태도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유대 나라 베들레헴에서 호적 조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젊은 부부 요셉과 마리아는 새로 호적을 하기 위하여 본적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손님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서 여관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집과 마을이 모두 사람으로 차고 넘쳤습니다. 이 젊은 부부는 머무를 곳을 얻지 못하여 어떤 집 외양간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밤에 마리아는 산기가 있어 아기 예수를 낳고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그 때에 베들레헴 성 밖 언덕에는 양떼를 지키며 밤을 보내는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세상의 어지러움을 탄식하며, 어서 메시야가 오셔서 세상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한 천사가 타나나 그 빛난 광채가 두루 비치니 저들이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누가복음 2장 10~12절)고 하였습니다.  
  이런 기별과 함께 천사들은 넓은 들과 산골짜기를 통하여 멀리 퍼진 이 찬미 소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이르는 축복과 평화를 노래한 것입니다. 과연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는 평안과 화평이 있습니다. 그들의 가정이나 사회에도 평화가 깃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다툼이 자취를 감추고 오직 화평만 있게 될 것이니, 예수님이야말로 ‘평화의 왕’이십니다.
 목자들은 천사의 지시대로 베들레헴 성으로 돌아가, 강보에 싸서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찾아보고 그에게 공손히 절하였습니다.  
또 먼 동방 나라에서는 박사들이 이상한 별을 보고 구주가 나실 것을 알고 유대 나라 베들레헴으로 찾아와, 구주로 나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황금과 유황과 몰약 등 매우 값진 예물을 드리고 갔습니다. 그들은 옛글 가운데서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민수기 24장 17절)라는 말씀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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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인간은 창조될 때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경륜을 따라,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주 존엄성 있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정(性情)을 능히 이해할 만큼 그 품성이 고상하고 지능이 뛰어났으며, 외모도 매우 건장하고 훌륭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이 왜 타락하게 되었을까요? 또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할만큼 매우 아름답던 세상인데 어찌하여 이토록 눈물과 한숨과 질병과 사망이 가득한 처참한 세상이 되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죄의 시작
  죄는 어떻게 또 누구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을까요? 예수께서는 불의한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한복음 8장 44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한일서 3장 8절)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죄는 마귀로부터 시작되었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니, 거짓말하고 욕심 내고 남을 미워하는 자들은 다 마귀의 부하들입니다.  
오늘날 과학을 숭상하고 유물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대개가 무신론을 주장하고, 선신(善神)이건 악신(惡神)이건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또 악신, 즉 마귀와 사단의 존재도 인정합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는 마귀라는 말이 34회, 사단이라는 말이 37회, 합해서 71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아울러 마귀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윗왕은 시를 지어 이르되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편 53편 1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어디서 왔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누가복음 10장 18절)고 하셨으며,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列國)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이사야 14장 12~15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침의 아들 계명성'은 '루 스벨'이란 말의 번역으로, 천사의 이름입니다. 루스벨은 본래 하늘에 있던 가장 아름다운 천사로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고 천사들 중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반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광스러운 '루스벨'(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란 이름 대신 '사단'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이 세상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벰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요한계시록 12장 7~9절).  
  여기서 말한 '미가엘'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루스벨이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시기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불평을 토하매, 하나님께서는 그를 타이르시고 그 불의의 마음을 버리고 회개하기를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불평 불만이 자라 마침내 반역하였습니다. 평화로운 하늘 분위기에 불평의 씨를 더 용납할 수 없으므로, 미가엘은 정의의 검을 들어 루스벨과 그 부하들을 하늘에서 내쫓았습니다. 하늘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큰 의문이요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주간의 모든 존재들 곧 천사들이나 인간들이 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그에 따라 당신께 순종하고 당신의 뜻에 즐겨 따르기를 심히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즐겨 순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이니, 이것이 없이는 어떤 사회나 어떤 나라도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원칙은 자유와 사랑이요, 사단의 나라의 원칙은 억압과 궤휼인 것입니다.  
 

에덴동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를 위하여 한 아름다운 동산을 만드시고,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거기 두시고 저희로 그 곳을 지키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행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가 살림난 자식의 집을 찾아가 그들의 행복한 생활을 살펴보고 잘 살기를 축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때때로 아담과 하와의 행복한 새 가정을 방문하사 저희를 도와주시고 저희의 행복을 더해 주시기를 심히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영원히 거하도록 하기 위하여 저들과 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창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장 8~10, 15~17절).  
  하나님께서는 처음 부부의 행복을 위하여 에덴동산 전체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은 그것을 아끼신 까닭이 아닙니다. 또 거기에 무슨 독이 있기 때문도 결코 아닙니다. 다만 당신과 사람 사이의 관계, 즉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시요 소유주이심을 영원히 인식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소유권의 표로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금단(禁斷)의 실과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에게 충성하는 표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께 충성할 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인 것입니다. 이 금단의 열매야말로 인간을 하나님께 붙들어맨 사랑의 줄이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마침내 불순종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하늘에서 이 세상으로 쫓겨온 사단의 속임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 벰이 가장 간교하더라 벰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벰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벰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존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창세기 3장 1~6절).  
  여기서 벰은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말하는 옛 벰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 그가 하늘에서 내쫓겨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의 경영을 방해하고 인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사단은 아름다운 벰의 탈을 쓰고(저주받기 전에 벰은 매우 아름다운 짐승이었습니다.) 하와를 속여,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기 말을 믿게 하였습니다. 세상을 속여 하나님을 의심하고 믿지 않게 하는 것은 사단의 상투적인 수단입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속이는 말을 듣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떠나는지요!
 

불순종의 결과
  마땅히 존경해야 할 조물주, 곧 자기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요 또 자기를 지극히 사랑함으로 에덴동산을 거처로 주신 하늘 아버지께 순종하지 않고 그에게 바칠 충성을 사단에게 바친 것은 실로 큰 반역이요, 범죄 행위입니다. 하나님과의 맹세를 저버린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이에 인간에게는 저주가 이르고, 생명의 길이 막히게 되고, 불행과 고통과 비참함이 그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창세기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3장 16~19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장 24절).  
  불순종의 결과로 아담과 하와는 그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살 특권과 생명나무와 실과를 먹을 특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꽃이 시들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볼 때 비로소 죽음이 만물의 운명인 것을 깨닫고 서글픔을 느꼈습니다. 그 후로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질수록 더 타락하여 점점 더 마음은 사악해지고 몸은 쇠약해 갔습니다. 인간은 진화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퇴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이 세상의 통치자가 되어 인류는 그 지배하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각처에서 시기와 투쟁과 처참함과 비극이 끊일 사이가 없고, 주림과 공포와 질병과 사망은 인간이 면치 못할 운명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과 악독과 잔인성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근본 목적이 아니요 하나님이 차마 그대로 두실 수도 없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관영(貫盈)하고 비참함이 극도에 달한 이 세상을 깨끗이 없애시고 처음 목적하신 정의와 사랑의 세계를 다시 실현시키려 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계획
  요즈음 각처에서 자동차 사고와 비행기 사고가 뒤를 이어 일어납니다. 그러나 허다한 사람들이 꿈에도 이런 사고를 생각하지 못하고 여행길에 오릅니다. 한치 앞도 볼 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내다보시는 예지를 가지셨습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의 참혹한 결과를 미리 내다보신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죄와 죄의 결과에서 구원하시고 건져내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성부(聖父)이신 하나님과 성자(聖子)이신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이루어진 '평화의 의논'(스가랴 6장 13절)입니다. 인류가 범죄하고 타락하였을 때, 성자께서 몸소 세상에 탄생하사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고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땅히 죽어야 할 인류가 죄에서 구속되고 영원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범죄한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벰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창세기 3장 15절)고 선언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태어나 사단의 권세를 누르고 승리하실 것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또한 양을 잡아 제사드리는 제도를 가르쳐 주심으로, 장차 구주께서 인류를 위하여 속죄 제물이 되실 것을 가르쳐 주시고, 그 의식을 행함으로 구주에 대한 믿음을 표시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 요한은 예수를 백성들에게 소개할 때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복음 1장 29절)라고 말하였고, 사도 요한도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요한계시록 13장 8절)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창세 이후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속죄제의 희생인 흠 없는 어린양은 장차 오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모든 속죄 제물을 드린 자들도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표명했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구속의 경륜
  “사람의 타락은 온 하늘을 슬픔으로 가득 채웠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죄의 저주로 시들었고, 비참하게 죽을 운명에 처한 존재들이 살게 되었다. 율법을 범한 자들이 피할 길은 없는 것같이 보였다. 천사들은 찬양의 노래를 그쳤다. 하늘 궁정 전체가 죄가 가져온 황폐 때문에 통곡하고 있었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사령관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타락한 인류를 불쌍히 여기셨다. 잃어버린 세계에 임할 화가 그분 앞에 떠오를 때에 그분의 마음은 무한한 동정심으로 감동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이 구속받을 수 있는 한 경륜을 입안하셨다. 깨어진 하나님의 율법은 죄인의 생명을 요구하였다. 온 우주에서 사람을 위하여 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이는 한 분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 자신처럼 거룩하므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만이 범법을 속죄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밖에는 아무도 타락한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하늘과 조화시킬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책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매우 가증하므로 아버지의 아들을 틀림없이 분리시킬 죄의 수치를 자진해서 떠맡으실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비참의 심연(深淵)에까지 내려가실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영문,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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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장 39절)

  우리는 지난 과에서, 성경은 인생의 앞길을 비춰 주는 등불이라고 공부하였습니다. 과연 성경처럼 우리 인류 역사에 빛을 주고 유익을 끼친 서적은 없으며, 또 이 책처럼 많은 사람이 읽고 오늘날도 계속해서 많은 사람이 읽고 연구하는 책은 없습니다. 그런데 일반인들 가운데 이 성경을 한갓 인간의 윤리 도덕을 말한 수양서(修養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에 흔한 처세훈(處世訓)이나 금언집(金言集)의 부류가 아니요, 그 이상의 고상한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진주보다도 더 값진 보물입니다. 곧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생명의 말씀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성경의 내력
성경은 본래 따로따로 기록되어 있던 66권의 책들을 한데 모아 성경전서(聖經全書)를 이룬 것입니다. 성경전서는 크게 구별해서 처음 39권을 구약(舊約)이라 하고, 나중 27권을 신약(新約)이라고 합니다. 구약은 주로 예수 탄생 이전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의 기록이요, 신약은 예수 탄생 이후에 예수를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의 기록입니다. 요약하자면, 성경은 이 세상 처음부터 마치는 날까지의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 곧 그분의 지극히 공의로운 정의와 무한히 넓고 깊은 사랑을 나타내 보여준 글입니다.
  구약의 원문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극히 적은 부분만이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며, 신약은 원문이 전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은 모세를 비롯한 약 30명의 기자가 기록하였고, 신약은 약 10명의 기자가 기록하였습니다. 그 기자들 중에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다 있는데, 위대한 제왕으로부터 훌륭한 정치가, 관리, 군대의 장관, 제사장, 학자, 의사, 농부와 목자, 심지어는 어부들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기록된 연대는, 구약이 기원전 1500년경부터 400년경까지 약 1100년에 걸쳐서 기록되었고, 신약은 기원후 50년경부터 100년경까지 약 50년에 걸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가 기록된 때로부터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기까지는 약 1600년의 긴 기간이 걸렸습니다.


모세오경
 모세 오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에 모세라는 사람이 기록한 구약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상 율법책이라고 일컫는 것으로,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입니다. 이 책은 조상들의 구전(口傳)과 하나님의 지시와 영감에 의하여 기록되었습니다. 특히 창세기의 기록을 볼 때, 그것이 사람의 생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줍니다. 우리가 깨끗한 마음과 아무 선입견이 없이 순수한 정신으로 창세기를 읽는다면, 그것이 만들어낸 이야기나 소설과 같은 공상적 기록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것임을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 오경은 구약 성경 중에서도 가장 기초되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물론이요 회교도들까지도 자기들의 경전으로 존숭(尊崇)하는 것이니, 세계 인구의 약 절반 정도가 이 오경의 감화와 영향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 오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권위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글
모세 이후로 시대를 따라 여러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예언서들을 기록하였는데, 그들 역시 성령의 감화와 지시를 받아 기록하였습니다. 그중에는 대선지서 5권, 소선지서 12권이 있는데, 이것은 기원전 400년경에 편찬되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약 성경에서는 이 책들을 가리켜 ‘선지서’ 혹은 ‘선지자의 글’이라고 일컫습니다.


역사와 시 문학서
구약 성경 가운데는 율법책이라고 일컫는 모세 오경과 선지자들의 예언서 외에도 역사적 기록과 시와 문학적 기록들이 있습니다. 역사적 기록 중에서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사무엘상, 하열왕기 상, 하역대상, 하 등 여러 책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하나님의 교훈과 그 명령을 순종하여 지키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는 경험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곧 세계 역사의 축도(縮圖)이며, 또한 우리 인간 생활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인간이 경계를 받고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지도를 받아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사람들은, 그 길이 평탄해서 마치 아름다운 꽃동산을 거니는 것처럼 유쾌했든지 혹은 그 길이 험난해서 가시밭길을 다니는 것처럼 괴로웠을지라도, 그 입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의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이 곧 시편과 아가서등의 훌륭한 시와 노래로 나타났습니다. 그 외에도 유명한 솔로몬왕의 잠언과 전도서같이 인생을 반성하고 인생의 길을 선도하는 훌륭한 교훈서와 철학서가 있습니다. 또는 욥기와 같이 우주 만상의 깊은 이치를 말한 것이 있는가 하면, 룻기나 에스더처럼 인정의 순박함과 민족을 사랑하는 열정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이 어떻게 당신의 택한 백성을 재난과 환난 가운데서 보호하시고 구원해 내시는가를 볼 때, 과연 성경은 보통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의 그 넓고 깊은 사랑의 섭리에 감격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신약성경
그러면 신약 성경은 어떤 책인가요?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기록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심을 증거하는 글입니다. 신약 맨 처음의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선생님의 생애와 교훈을 기록한 것이요, 그 다음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와 예수교를 심히 박해하다가 개종하여 예수의 열렬한 사도가 된 바울과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증거하며 전도한 경험을 기록한 사도행전입니다.  또 그 다음은 바울과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서신(書信)이며, 맨 나중은 그리스도 자신의 영감을 통하여 사도 요한에게 증거한 예언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리하여"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로 시작된 성경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요한계시록 22장 20절)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
위에 기록한 것과 같이 구약은 주로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기록이요, 유대인이 존숭(尊崇)하는 경전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약 시대에는 구약이 이미 폐하여졌고 시대에 적합치 않으므로 별로 상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누가복음 24장 4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의식(儀式)과 제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했고, 그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은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열쇠 없이 구약을 풀지 못하고, 구약 없이 신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로 이해하려면 신약이나 구약을 차별 없이 연구해야 하고, 서로 대조 연구하는 가운데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의 말씀인가?


성경은 누구의 말씀인가?
위에서 모세 오경이나 선지자의 글이 하나님의 신의 지시와 영감을 통하여 기록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의사로 기록된 것이 아니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문자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구약 성경을 가리켜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편 118편 22, 23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책은 사람의 지식과 사상을 기록한 것이지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디모데후서 3장 16절)이라고 신약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베드로후서 1장 21절)고 하였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과 같은 책은 그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1장 1절)고 밝힘으로써, 이것이 요한 자신의 저작이 아님을 나타냅니다.그뿐 아니라 성경 66권의 기자들은 자기들의 기록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수없이 표시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주의 신이 내게 임하여” 등과 같은 말씀들이 구약 성경 가운데 3,800번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권위있는 표현은 다른 경전에서는 볼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이것이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면, 수천 년  계속해서 존숭(尊崇)을 받을 만큼 그 권위를 유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목적
 성경이 기록된 목적성경은 무슨 목적으로, 누구를 위하여 기록되었을까요?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디모데후서 3장 15∼17절).“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장 39절). 
  첫째 말씀은 사도 바울의 말씀이요, 나중 말씀은 예수의 말씀입니다. 이 두 성경 구절을 종합해 보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요, 예수 안에 영생이 있는데 우리 인간이 성경을 부지page14런히 연구함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되며 선을 행할 수 있는 완전한 인격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구주가 되시는 예수를 믿고 순종함으로 죄를 이기고 하늘 백성의 특권을 얻어 영생에 들어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요한은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났으므로 우리는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밖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이신 예수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성경은 얼마나 가치있고 보배로운 책입니까?


성경의 불변성과 그 감화력
시대는 가고 세대는 바뀝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합니다. 오늘의 진리가 내일은 오류가 됩니다. 사람들의 지식이나 사상은 시대를 따라 무가치해집니다. 한때 인기 있던 서적도 얼마 안 가서 그 인기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과 진리는 영원히 빛납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베드로전서 1장 24, 25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영화와 인간의 권세는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집니다. 애굽의 피라미드를 보십시오. 바벨론의 폐허를 보십시오. 로마의 콜로세움(원형극장·그리스도교인을 박해하던 곳)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박해하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권력들은 저렇듯 처량한 유적들만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전세계에 퍼졌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위대한 감화력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무신론자 볼테르는 “성경은 내버린 책이다”라고 말했으며, 미국의 회의주의자 잉거쏠은 “이제 10년만 지나면 성경을 읽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며 장담했지만, 프랑스 혁명 당시 그렇듯 학대받고 불살라버렸던 그 성경은 4년이 채 되기 전에 다시 해방되어 프랑스 사회의 무질서를 바로잡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또 영국 농촌의 피폐가 극도에 달하고 사회의 불안이 날로 극심해져 갈 때, 그것을 바로잡아 혁명 없이 사회 개조에 성공한 것은 존 웨슬레의 ‘메더디스트’(Methodist) 운동, 곧 성경 말씀을 가지고 방방곡곡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한 결과라는 것은 온 세상이 잘 아는 사실입니다.
  또한 아프리카나 태평양 섬 중의 식인종들이 사람 고기를 먹던 악습을 버리고 선량한 백성으로 변화된 것은 정치나 교육의 힘이 아니라 오직 종교의 감화였으며, 성경 말씀의 능력이었다는 것은 과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베드로전서 1장 23절).“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브리서 4장 12절). 성경은 실로 생명력이 있는 말씀이요, 우리의 심령을 찔러 쪼개는 능력을 가진 말씀입니다. 사람이 성경 말씀의 감화를 입을 때 새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하여 무한히 달고 아름다운 맛을 느끼게 됩니다. 옛날의 한 성경 연구자는 그 감상을 시로 노래하기를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편 119편 103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은 읽으면 읽을수록,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되고, 그 깊고 오묘한 뜻을 깨달아 감격하게 됩니다.
  본 교과를 공부하는 여러분들도 각 교과를 공부하는 중에 그처럼 달고 오묘한 맛을 보시며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 과에서는 세계의 기원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2015.03.27 12:46

제 1과 인생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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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편 105절).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생겨났으며, 어떻게 태어났는가?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은 어느 길인가? 인생이 왜 이리도 괴롭고 어지럽고 모순투성이인가? 이런 수수께끼 같은 문제들이 우리 마음을 번뇌케 하고 어지럽게 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인생이 너무도 무상하고 괴롭고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그 일생을 통하여 온갖 영화를 다 누리고 마음에 원하는 것은 다 해보며 갖은 즐거움을 다 맛보았으나 결국에 가서는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도서 1장 2∼4절)라고 탄식하였습니다. 또 신약 성경 야고보서의 기자 야고보는 이르기를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장 13, 14절)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두 성경 말씀은 인생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왕은 영화와 부귀를 한껏 누리고도 끝내는 인생의 허무를 그렇게 느꼈으니, 가난의 밑바닥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육신의 고통과 마음의 염려로 어쩔 줄 모르는 일반인들이야 인생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얼마나 더 느끼겠습니까?  
  인간이란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울며 고생하다가 늙고 병들어 결국은 죽고 맙니다. 이것이 곧 인간이 면하지 못하는 운명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인간의 허무하고 속절없는 운명을 해결해 줄까요?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이 비록 달세계는 정복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번민과 죽음의 운명은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 그 이상의 지식, 곧 인간 이상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이에 비로소 종교의 필요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란 인간 이상의 능력자, 즉 신(神)이나 어떤 대상에게 귀의해서 그를 신앙하고 그에게 예배하고 그에게 복을 구하는 일을 말하는데, 종교(宗敎)라는 한자(漢字)의 의미로 본다면 “으뜸되는 가르침”, “근본적인 교훈”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근본적인 문제, 즉 현실 이상의 영원한 문제를 가르쳐 주는 것이 곧 종교입니다. 사람은 종교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동서 고금을 통하여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종교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한 심리학자는 “사람은 종교적 동물이다”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사람만이 신앙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식욕과 정욕 등 생리적 욕구와 마찬가지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제아무리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자연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실 때 당신을 사모하고 신뢰할 수 있는 본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인간에게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어떤종교를 믿어야 할까?

  세상에는 종교도 많고 종파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종교나 믿기만 하면 될까요? 비록 길이 다를지라도 결국 도달하는 목적지는 모두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종교는 사회 교화(敎化)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거기에 천국이 있거나 영생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단순히 그러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참된 의미로서의 종교가 아니며 교화의 참된 효과도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현실 이상의 만족과 희망을 주지 못하고 영원으로 통하는 길을 제시하지 못하는 종교는 참 종교일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4장 12절)고 하였습니다. 어느 종교나 다 참된 길이라고 스스로 말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르쳐주지 않는 종교는 바로 사망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것이 바른 길이며 생명의 길인지 깊이 생각하고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한 기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예레미야 6장 16절)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원으로 통한 옛적 길(특히 옛적 길이라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품성의 변화를 가져오는 선한 길,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주는 희망의 길이라야 선한 길이요 참 도리요 믿을 만한 종교인 것입니다.
 

가장 권위있는 종교 
  종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 종교’라고 해서 천연물이나 금이나 은,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원시 종교요, 둘째는 ‘계시 종교’라고 해서 신의 계시를 받아 이루어진 경전을 가진 종교입니다. 그리고 섬기는 신에 따라서 범신교, 다신교, 일신교로 구분하기도 하고, 그 분포 범위에 따라 민족 종교, 국민 종교, 세계 종교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민족만이 신앙하는 종교보다는 세계적인 종교가 우수한 종교요, 여러 종류의 신을 섬기는 범신교나 다신교보다는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가 가장 우수하고 발달한 종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이 모든 우수한 조건을 구비한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계시로 된 신구약 성경을 가진 것은 이 종교를 가장 권위있게 만들었습니다.
 


인생의 등불 
  우리 인생은 마치 캄캄하고 어두운 밤에 등불도 없이 더듬어 나아가는 것같이 알 수 없는 운명을 향하여 매일매일 더듬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돌에 부딪치기도 하고 혹은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하며 고통과 실망과 번민을 당하는 예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등불을 가지고 걸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등불이란 무엇인가요?
  옛날 이스라엘 나라의 한 시인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장 105절)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여기서 “주의 말씀”이라 한 것은 곧 성경을 말하는데, 그리스도교의 성경 ‘바이블’ (Bible)이 우리 앞길에 빛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은 말하기를 “성경을 읽으면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이는 그대의 마음, 그대의 행복, 그대의 의무의 열쇠가 이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나는 대통령으로서의 나의 앞에 놓인 문제들을, 내가 성경을 얼마나 충실히 연구하는지 그 비례에 따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미국 FBI 국장이었던 J. 에드가 후버씨는 “성경은 사람에게 완전한 인생을 지시해 주는 확실한 인도자이다. 그것은 영적 양식의 근원이요, 선량한 생활로 인도하는 영감(靈感)이다”라고 하였으며, 아브라함 링컨은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리신 최상의 선물이다”라고 하였습니다.이상과 같이, 우리보다 먼저 산 위대한 인물들이 그들의 경험을 통해서 성경의 가치를 그렇게 높이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성경을 그렇게 가치있게 인정하고 그 내용을 검토하고 그 진리를 연구한다면, 우리 인생길을 아주 안전하고 명랑하게 걸어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 다음 과부터 성경이 어떤 책이며 무엇을 말하는지 차근차근 연구해 보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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